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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ing Note/일본소설

하루키 문학의 뿌리를 만나다

[서평] <중국행 슬로보트> (무라카미 하루키 씀 /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4.04 / 11,500 )

 

하루키를 처음 접한 건 중학생 때 엄청 야한 일본소설이 학교 도서관 추천도서 목록에 있다는 응큼한 친구의 제보를 통해서였습니다. 그때 접한 책이 그 이름도 유명한 <상실의 시대>였습니다. 당시에는 소설에 깔린 음울한 분위기와 너무나도 독특하고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들에 매료되어서 한동안 빠져나오지 못했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야시시했던 성애장면에서 더욱 돋보이는 하루키의 필력은 사춘기 소년에게 큰 자극제 역할을 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 하루키를 다시 접하게 된 시기는 군대였습니다. 하루 하루가 정말 소름끼칠 정도로 똑같이 돌아가는 일상에 지쳐갈 때 쯤 계급을 상징하는 작대기가 하나 둘 늘어가고 어느덧 주위의 눈치를 보지 않고 책을 읽고 TV를 볼 수 있을 때가 되었을 때 손에 잡힌 책이 바로 하루키가 쓴 단편들을 모아 놓은 <렉싱턴의 유령>이라는 단편집이었습니다. <상실의 시대> 같은 장편에서 느낄 수 없었던 하루키 만의 독특한 상상력과 에세이와 소설 사이에 있는 느낌의 독특한 형식의 작품들이 매력적으로 다가왔고 그 후로도 많은 하루키의 작품들을 찾아봤습니다. 그러던 중 새 책이 나온다는 소식이 들려오더군요.





새롭게 출간된 하루키 문학의 뿌리를 엿볼 수 있는 작품집

 

이번에 문학동네에서 다시 출간 된 <중국행 슬로보트>는 하루키의 초기 장편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1973년의 핀볼>을 쓴 직후에 쓰여진 단편들을 모은 작품집입니다. 국내에는 열림원과 문학사상사에서 이미 출간된 적이 있었지만 문학동네에서는 일본에서 하루키 전집이 출간되면서 작가가 직접 개정한 텍스트를 기반으로 다시 번역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집 형태로 출판하는 것이고, 단행본 오리지널 버전과 다른 또하나의 선택지를 제공할 다시없는 기회이기 때문에 큰맘 먹고 개정하기로 했다. 대폭 손댄 것도 있고, 몇 구절 표현을 고치는 정도에 그친 것도 있다. 개정에 대해서는 독자 사이에도 이론이 분분할 것이다. 하지만 작가로서는 당시 표현하고자 했으나 충분히 표현하지 못했던 부분을 조금이라도 명확하게 만드는 것을 기본 방침으로 개정에 임했다.” - p.255 작가의 말

 

하루키의 초기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는 이 단편집에서 가장 크게 부각되는 점은 하루키의 독특한 창작활동입니다. 자칭 제목 선행식 글쓰기라고 부르는 이 방법은 유명한 곡이나 배우 이름에서 단어를 따온 뒤 거기에 관련한 이야기를 붙여나가는 식입니다. 가령 이 책의 표제작 <중국행 슬로보트><온 어 슬로보트 투 차이나>라는 곡에서, <시드니의 그린 스트리트>라는 작품은 <몰타의 매>에 출연한 배우 시드니 그린스트리트에서 출발해 완성된 작품들입니다.



작품집에는 7편의 단편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위에 먼저 언급한 '제목 선행식 글쓰기'로 쓰인 작품들 뿐만 아니라 마치 뮤직비디오의 메이킹 필름을 보듯 소설 쓰는 과정에 대한 소설이라는 독특한 형태의 <가난한 아주머니 이야기>라든가 작가가 '카세트 테이프 소설'이라 이름붙인 한 화자가 카세트 테이프에 녹음하는 형태로 진행되는 <캥거루 통신> 같은 실험적인 작품이 수록되어 있어 <상실의 시대>나 <1Q84> 같은 장편에서 느낄 수 없는 하루키 만의 통통튀는 필력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작품집입니다.

 

문학동네에서는 앞으로 <반딧불이>, <빵가게 재습격>, <회전목마의 데드히트> 등의 작품도 이번 <중국행 슬로보트>처럼 작가의 개고 사항을 반영해서 출간할 예정이라고 하니 하루키의 팬이라면 통장의 잔고를 확인해 보셔야 할 듯 합니다.


중국행 슬로보트 - 10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