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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ing Note/영어권소설

폴 오스터의 일기장을 훔쳐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서평] 폴 오스터의 <겨울 일기>(2014)


[폴 오스터] 겨울 일기 / 송은주 역 / 열린책들 출판 / 출간일 2014-01-15 / 원제 Winter Journal (2012년).


초등학생 시절 다른 친구들의 그림일기장을 몰래 훔쳐보는 친구들이 반에 꼭 하나 둘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마음 여린 여자애들을 울며불며 뛰어다니고, 짖궂은 남자애들은 일기를 읽으면서 도망다니고... 그리고 이 난장판은 언제나 선생님이 들어오고 나서야 해결되곤 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선생님은 그런 일이 꽤 자주 있었는데도 일기장을 걷고 나눠주는 과정을 계속 아이들에게 맡기셨던 것 같습니다. 


남의 일기장을 읽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그 사람 밖에 알지 못하는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으니 참 흥미로운 일입니다. 하지만 정작 일기를 쓴 당사자에게는 감추고픈 비밀이 들키게되니 절대 보여주지 않으려하기 마련이죠.


오늘 살펴볼 책은 자신의 일기를 전 세계인에게 당당히 공개한, 그것도 소설적 요소가 아주 가득한 매력적인 문장으로 완성된 하나의 작품으로 내놓은 폴 오스터의 <겨울 일기>입니다.


작품을 읽기 시작하면 '독특하다'라는 단어 외에는 딱히 이 작품을 표현할 단어가 떠오르지 않게 될 겁니다. 작품은 2인칭으로 주욱 진행됩니다. 소설의 화자가 '당신'이라 불리우는 대상에게 말을 거는 식으로 전개되는 이 작품은 사실 저자 폴 오스터의 자서전이라 할 수도 있고 독특한 일기장이라고도 할 수 있는 소설입니다.



작품의 시점은 들쭉날쭉합니다. 예순네살의 '당신'을 지켜보기도하고, 아주 어린 시절로 돌아가 그 때 벌어졌던 사건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기도 합니다. 철없던 시절의 풋사랑과 나이를 먹은 후의 아내와의 원숙한 사랑이 겹쳐서 그려지기도 합니다.


작품이 집중적으로 다루는 것은 '육체'입니다. 몸의 여기저기를 살펴보면서 그 신체부위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순서에 상관 없이 떠오르는데로 기록된 듯한 느낌을 주는 일기가 완성되었습니다.


당신의 육체가 역사로부터 삭제된 사건들의 집합소라고 생각하니, 아주 당혹스러운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기분이 좀 묘해진다. p.14


누구나 자신의 인생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하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남에게 털어놓을 때 어디까지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폴 오스터의 일기장을 훔쳐보면서 놀랐던 가장 큰 이유는 부끄러워서 혹은 도덕적인 비난을 받을까봐 이야기하기 어려운 사건들도 너무나 담담하게 적어내려가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아내가 거의 죽을 뻔 했던 자동차 사고를 일으킨 이유가 터질 것 같은 오줌보를 비우고 싶어서 부주의하게 코너를 돌았던 경험, 사랑하는 개가 죽는데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는 친구가 대신 죽었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했던 기억, 그리고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했던 한 아버지의 지인에게 망신을 줬던 삼촌에게 그 자리에서 화를 내지 못했던, 최소한 그 지인에게라도 말을 건네지 못했던 자신에 대한 깊은 수치심 때문에 스스로를 더 이상 영웅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는 기억까지....


하지만 이 책을 단순한 일기장이나 자서전으로 보기에는 문장이 너무나 좋습니다.


당신들이 부부가 되었음을 선언한 직후, 당신이 아내를 안고 막 입 맞춘 바로 그 순간 드디어 폭풍우가 휘몰아치고 당신 바로 머리 위 하늘에서 우렁찬 천둥소리가 울렸다. 창문이 덜거덕거리고 발밑의 마루가 흔들렸다. 방 안의 사람들은 헉 하고 놀랐다. 마치 하늘이 온 세상에 당신의 결혼을 알리기라도 하는 듯했다. 아무런 의미도 없으면서 또 깊은 의미가 있는 것 같기도 한, 극적이면서도 이상한 타이밍이었다. 당신은 평생 처음으로 우주적인 사건에 참여하고 있다는 기분을 느꼈다. p. 111


아직 폴 오스터의 작품을 접해보지 못한 저를 비롯한 많은 독자들에게 이 책은 또한 폴 오스터의 다른 작품들을 읽는데 도움이 되는 배경지식을 전달해 주는 역할도 충실히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일기장 곳곳에서 어떤 작품을 쓰고 있을 때 이런 일이 있었는지, 이 사건은 어떤 작품에서 이미 이야기 했던 적이 있다는 지를 충실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책장 어딘가에 이 일기장을 꽂아놓고 저자의 다른 작품을 읽을 때 함께 뒤적거려 주는 용도로도 쓸모 있을 작품입니다.


이번에는 육체적 자서전 성격의 책이었지만, 곧 열린책들에서 폴 오스터의 정신적 자서전이라고 볼 수 있는 <내면 보고서>(Report from the Interior)가 출간될 예정이라고 하니 이 책과 같이 엮어서 읽으면 폴 오스터의 작품세계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듯 합니다 ^^


본 포스팅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14.02.16)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58522)



겨울 일기 - 8점
폴 오스터 지음, 송은주 옮김/열린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