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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ing Note/시/수필

하루키의 스크랩, 응답하라 80년대!

[무라카미 하루키] 더 스크랩 / 권남희 역 / 비채 출판 / 출간일 2014-02-20 / 원제 The Scrap: 懷かしの一九八ㅇ年代 (1987년).


인터넷 서점에서 배달한 책을 상자에서 꺼냈을 때 놀라는 경우는 몇 가지 경우로 한정됩니다.


1. 책이 파손되어서 왔다.

2. 내가 시킨 책은 안오고 시키지 않은 책이 왔다.

3. 내가 생각한 책이 아니다(?)


이번 경우는 딱 3번에 해당 했습니다. 책이 이상해!! 책이 마치 애플의 사과문양 처럼 한 귀퉁이가 뎅강 잘려있습니다. 제가 알라딘에서 주문할 때에 표지 이미지를 눈여겨 보지 않아서인지, 하얀 표지의 책이라 모니터 화면에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생각치 못한 판형의 책을 만났을 때의 놀라움은 저에게 독특한 첫인상을 남겨주었습니다.




이 책에 실린 하루키의 글들은 모두 <스포츠 그래픽 넘버>라는 잡지에 1982년 봄부터, 1986년 2월까지 연재한 일종의 칼럼입니다. 국내에는 2004년에 문학사상사에서 윤성원 역으로 나온바 있는데 이번에 비채에서 권남희 역으로 새롭게 출간되었군요.  모양도 독특한 이 책이 탄생하게 된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넘버>의 연재기획 자체가 참 독특합니다. 가타부타 긴 말 필요없이 서문에 나오는 하루키의 글을 그대로 인용하겠습니다.


어떤 글이든 일 년 이상 계속 쓰면 질리는 체질인 내가 <넘버>에 장기 연재를 한 것은 예외 중의 예외다. 

  어째서 이렇게 오래 썼는가 하면 이유는 간단하다. 글을 쓰는 것이 정말 즐거웠기 때문이다. 먼저 한 달에 한두 번 <넘버>에서 미국 잡지며 신문을 왕창 보내준다. 보내주는 것은 <에스콰이어><뉴요커><라이프><피플><뉴욕><롤링스톤> 등의 잡지와 <뉴욕타임스> 일요판이다. 나는 뒹굴거리며 잡지 페이지를 넘긴다. 재미있을 법한 기사가 있으면 스크랩해서 그걸 일본어로 정리하여 원고를 쓴다. 이것으로 한 편 끝. 

  어떤가요, 즐거워 보이죠? 솔직히 말해 정말로 거저먹기였다. - p.004.


잡지의 편집자가 어떤 생각으로 이런 기획을 했을까 싶기도 하지만, 막상 그 원고를 쓰는 작가가 무라카미 하루키라면 일면 납득이 가기도 합니다. 하루키는 이 연재를 마친 뒤에 발표한 <노르웨이의 숲>으로 하루키 신드롬을 낳기도 했으니 편집자는 그 때까지의 작품들로 하루키의 가능성을 꿰뚫어보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넘버>에 실린 글들의 날짜가 매월 5일과, 20일로 적어져 있는 것을 보면 대략 2주 마다 출간되는 잡지였나본데, 뒹굴거리면서 왕창 배달된 잡지를 뒤적거리다가 흥미로운 기사 몇 편을 스크랩하고, 그걸 토대로 글을 뚝딱써서 잡지사에 보내는 것 만으로 "끝!" 나다니.... 정말 부러운 직업이 아닐 수 없네요.


하지만 하루키 스스로 "거저먹기였다"라고 표현했지만 글들도 거저 쓰여진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삼십여년이 지난 지금에 봐도 흥미진진한 글들을 용케 고르고 고른 다음 하루키 특유의 위트가 가득한 코멘트를 달아 만든 하루키 만의 명품 에세이가 되었습니다.





다시 서문으로 돌아가보면 하루키는 이 책을 이렇게 봐달라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스크랩북은 문자 그대로 잡탕으로, 페이지를 넘기면서 "맞아, 맞아, 이런 일도 있었지"라든가 "오오, 이런 일이"하는 식으로 마음 편하게 '가까운 과거 여행'을 즐겨주신다면 나로서는 더없이 기쁠 것이다. - p.006


사실 저는 하루키가 스크랩을 열심히 했던 그 기간에 태어나지도 않았기에, "맞아, 맞아, 이런 일도 있었지"라는 공감은 할 수 없었지만, "오오, 이런 일이" 라고 느낄 스크랩들은 꽤나 많이 있었습니다. 


미국의 잡지에 실린 글들을 일본의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형식이다보니 동서양의 문화 차이를 하루키의 시선으로 해석한 부분에 주로 공감이 많이갔지만,  <오디오의 지옥성에 관해> 라는 칼럼에서 오디오의 성능을 끌어올리기 위해 부품을 교체하면서 가족에게 들키지 않거나, 들켜도 얼버무리기 위해 노력하는 하루키의 이야기가 주위에서 DSLR에 푹 빠져서 수백만원짜리 렌즈를 새로 샀다가 혼나는 요즈음 사람들의 이야기에 오버랩되면서 80년대의 삶도 지금 우리가 사는 삶이나 큰 변화는 없었구나 하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삼십여년이 지난 지금도 공감이 가고 다음 페이지에는 무슨 이야기가 나올까 궁금해지는 이 독특한 스크랩북을 읽다보니 기록이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하루키 만큼의 글을 쓸 수 있는 날을 꿈꾸며 저도 오늘 그의 스크랩북을 스크랩합니다. 



더 스크랩 - 10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비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