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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ing Note/영어권소설

식민지의 비극에 대한 조지 오웰의 고발

[서평] 조지 오웰의 <버마 시절>(1934)


[조지 오웰] 버마 시절 / 박경서 역 / 열린책들 출판 / 출간일 2010-03-25 / 원제 Burmese Days (1934년) 


최근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채택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습니다. 학생들과 국민들이 가장 분노한 부분은 교학사 교과서의 일제의 식민통치 시기에 대한 서술이 다른 7종의 한국사 교과서와는 180도 다르게 '식민사관'에 기초해서 기술되어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교학사의 한국사 교과서는 친일인사 미화, 식민지 근대화론 수용, 위안부 문제 왜곡 등 역사 왜곡을 한 부분도 많았고 국민정서에도 맞지 않아 전국적으로 0% 대의 채택률을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반세기 전에 일어났던 일본 제국주의가 만든 비극은 아직도 이 땅에 남아있습니다. 오늘은 이와 같은 제국주의의 비극이 일어났던 또 다른 곳, 영국의 식민지였던 1920년대 버마에서의 식민지의 실상을 다룬 조지 오웰의 소설을 다뤄보고자 합니다.


작가의 경험이 담긴 고발적 소설


<동물농장>, <1984> 등으로 유명한 영국의 소설가 조지 오웰은 1921년 명문 이튼스쿨을 졸업한 뒤 제국주의 경찰에 지원해 1922년부터 1927년까지 버마에서 근무하였습니다. 요즘말로 하면 사회초년병 시절을 보낸 시기를 다룬 작가의 경험과 시각이 남아있는 작품이 바로 <버마 시절>입니다. 버마가 영국에 의해서 영국령 인도로 완전히 합병된 시점이 1886년이었으니 조지 오웰이 복무했던 시기는 식민지로서 40여년의 세월을 보낸 1920년대입니다.


열린책들, 2010


작품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크게 네 부류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

'원주민이면서 식민주의에 아첨'하는 치안판사 우 포 킨, '원주민이면서 식민주의를 찬양'하는 의사 베라스와미, '영국인이면서 식민주의에 반대'하는 목재상 대리인 플로리, 그리고 '영국인이면서 식민주의를 맹신'하는 백인들의 인종적 우월성을 주장하는 나머지 백인들입니다.


작품 전체를 이끌어가는 등장인물은 플로리이지만 3인칭 전지적 작가시점에서 쓰여진 작품이라 각 장 마다 주요한 인물의 입장에서 소설은 진행됩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원주민인 우 포 킨과 베라스와미는 모두 '유럽인 클럽'에 들어가기를 희망합니다. 


"사람들이 그의 말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는 전적으로 나와 유럽인들의 관계에 달려있습니다. 인도에서는 늘 이런 식이지요. 명성이 좋으면 올라가고 나쁘면 추락합니다. (중략) 유럽인 클럽의 회원이 되는 것이 우리 원주민들에게 얼마나 큰 명성을 얻는 것인지 당신은 모르실 겁니다. (중략) 클럽 회원은 신성불가침의 존재들입니다." - 3장 中 베라스와미의 대사


바로 이 곳에 가입하는 것이 원주민이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위치이자 영광이기 때문이죠. 베라스와미는 비열한 관료 우 포 킨의 마수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패막이로서의 유럽인 클럽 입회를 원하며, 우 포 킨은 그가 찬양하는 영국 제국주의의 인정을 받기 위해 입회를 바랍니다.


"그는 자신의 민족이 이 거대한 인종과는 상대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국 편에 서서 싸우는 것, 다시 말해 그들에게 아첨하는 기생충이 되는 것이 어릴 때부터 그의 주된 야망이 되었다." - 1장에서 우 포 킨을 묘사한 부분


버마 유일의 원주민이 한 명도 없이 백인만으로 이루어진 유럽인 클럽이던 카우크타다라는 마을의 클럽 총무이자 부국장인 맥그리거가 상부로부터 원주민 한 명을 받아들이라는 공문을 받은 뒤로 이들의 희망은 목표가 됩니다. 클럽의 다른 백인들은 대부분 이를 반대하지만 베라스와미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제국주의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플로리는 고민에 빠집니다.


작품의 중반부에는 버마로 남편감을 구하러 온 엘리자베스라는 여성이 등장합니다. 버마에서의 외로운 삶에 지쳐있던 플로리는 그녀를 배우자로 맞아 버마에서의 즐거운 여생을 보내고자 동양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그녀에게도 주입하려고 하지만, 이는 오히려 백인 우월주의에 빠져있는 엘리자베스에게 플로리에 대한 반감만을 키우고 맙니다.


"그는 버마와 같은 외국에서 백인으로 마음 편히 살려면 원주민들을 경멸해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한 지 이미 오래였다." - 10장에서 플로리를 묘사한 부분


소설의 후반부는 플로리와 엘리자베스와의 로맨스, 원주민과 백인 사이의 갈등, 그리고 베라스와미와 플로리를 파멸시키려는 우 포 킨의 계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 모두가 불행한 식민지의 비극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3장에 등장하는 플로리와 베라스와미의 대화입니다. 식민지에서 일정 부분 특권을 인정 받고 있는 백인이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가지고 있는데 반해, 백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원주민 의사는 제국주의에 대한 찬양을 늘어놓는 아이러니가 가득한 장면 입니다.


조지 오웰은 플로리의 대사를 통해서 식민지 근대화론을 비난하고 영국 제국주의의 허구성을 폭로합니다.


"물론 우리가 약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검은 형제들을 계몽시키러 왔다는 거짓말이죠. 아주 자연스럽지요. 하지만 그 거짓말이 우리를 타락시키고 있소. 당신이 상상도 하지 못할 방법으로 말이오. 우리에게는 천성적으로 협잡꾼과 거짓말쟁이가 되어 밤낮으로 우리 스스로를 정당화하라며 끊임없이 충동질하고 괴롭히는 기질이 있소. 이것이 우리가 원주민들에게 가하는 야만적 행태의 원인 중 하나죠.(후략)" - 3장 中 플로리의 대사


하지만 식민사관에 사로잡힌 베라스와미에겐 영국인들의 식민지 통치는 거룩한 자기희생으로 여겨집니다.


"버마인들이 스스로 무역을 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기계와 배를 만들고 철도와 도로를 건설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당신들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지요. (중략) 당신네 사업가들은 우리 국토의 자원을 개발하고, 관리들은 우리를 문명화시켜 당신들 수준까지 끌어올리죠. 이것은 자기희생의 빛나는 기록입니다." - 3장 中 베라스와미의 대사


식민지에서 작가가 실제 겪었던 경험으로 얻게된 제국주의의 비극을 독특한 특성을 지닌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서 고발하고 있는 이 소설. 특히 식민지의 역사를 겪었던 우리 독자들에겐 조지 오웰 특유의 비관주의와 냉소적인 묘사가 더욱 슬프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말 슬픈 것은 일찍이 그가 고발했던 이 제국주의의 악령이 아직도 이 땅에 남아서 남은 민족을 양편으로 갈라놓고 있다는게 아닐까요?


본 포스팅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14.01.22)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50477)




버마 시절 - 10점
조지 오웰 지음, 박경서 옮김/열린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