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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ing Note/기타 해외소설

자연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인간의 저항

[서평] <자연을 거슬러> (토마스 에스페달 씀 / 손화수 옮김 / 열린책들 / 2013.03 / 11,800 원)


언제까지나 함께 있을 것만 같던 어린 시절 동네 소꿉친구들이 큰 길을 경계로 다른 초등학교로 가게 되어서 헤어지면서 세상을 살아가는게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처음 알았던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를 진학할 때는 성적 때문에 친구들과 다른 학교를 가게되는 경험도 하게되었고, 대학에 진학할 때는 집에 돈이 없어서 사립대학을 가지 못하거나 수도권 대학 진학을 포기하는 친구들도 많이 봤죠.


하지만 인간들이 만든 사회제도와 이 제도가 선택한 자본주의 때문에 겪는 이런 나뉨은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이라도 있지만 자연의 법칙으로 인한 나뉨은 극복할 수가 없습니다. 짝사랑하던 친구에게 사랑을 고백했다가 거절당해 며칠을 폐인처럼 보낸다거나, 언제나 거리에서 마주치던 옆집 아주머니가 어느날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는 것 같은 경우죠. 성숙한 후에는 이런 일에 익숙해지는 시간이 짧아지기는 하지만 자연에 대한 인간의 저항은 언제나 계속될 것 같고, 언제까지나 인간의 패배로 남게 될 것 같습니다. 오늘은 바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저항을 자전적인 이야기로 그려낸 독특한 작품 <자연을 거슬러>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시점과 공간의 변화가 자유로운 독특한 소설


노르웨이 작가 토마스 에스페달의 <자연은 거슬러>는 매우 독특한 소설입니다. 소설 속 시간과 공간의 자유로운 이동과  삶을 그대로 담아내면서 그에 대한 깊은 통찰을 해내는 독특한 문학 세계가 인상적입니다. 형식적으로는 6편의 짧은 이야기들을 엮어낸 소설집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수필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는 독특한 문체가 인상적입니다. 토마스 에스페달은 이처럼 엄격한 틀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쓰는 작가로 유명하다고 하네요.


독특한 작품의 형식 덕분에 작품에 몰입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어떨 때는 '나'를 중심으로한 1인칭으로, 어떨 때는 '그'와 '그녀'가 중심이 된 3인칭으로도, 그리고 책 속의 책 같은 느낌으로 등장하는 '아벨라르'와 '엘로이즈'가 등장하는 이야기까지,  지금 이 시점에서 작가가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지, 이 이야기가 여기서 왜 나왔는지 이해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기 때문이죠. 하지만 작품의 서사를 이해하는 것을 포기하고 작품을 무작정 읽어 내려가다 보면 작가가 원하는 읽기 방법이 바로 이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작품은 바로 앞 장이나 이 다음 장의 내용을 생각하기 보다는 현재 읽고 있는 페이지에 집중하는게 최선의 독서 방법인 특별한 작품이기 때문이죠.



자연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인간의 저항



사랑하는 이가 떠난 후 그는 부엌에서 늘 그녀가 먹던 복숭아 세 알을 발견합니다.


"이제 이 과일을 베어 물 사람은 집 안에 없다. 붉은 빛이 감도는 황금색의 둥그런 복숭아를 보노라면 그녀의 피부가 떠오른다. 복숭아의 굴곡은 그녀의 등을 떠오르게 한다. 복숭아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쭈그러들고 껍질은 번질거리기 시작한다. 곧 썩어 들어가겠지. 하지만 난 썩어 문드러진 복숭아를 버릴 수 없을 것만 같다." p.185


작품에는 작가의 솔직한 사랑이야기와 그 사랑을 잃은 뒤 고통스러워 하는 인간의 모습이 너무나 솔직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마치 빛이 생겼다가 사라지고 거기에 남은 컴컴한 어둠처럼요. 이와 같은 과정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이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기에 속절없이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일입니다. 자연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인간의 모습, 거기에 순응하고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처절한 모습이 소설 여기저기에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자연을 거슬러 - 10점
토마스 에스페달 지음, 손화수 옮김/열린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