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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ing Note/영어권소설

단편 소설의 거장, 먼로의 시선으로 본 사람들의 삶

[앨리스 먼로] 디어 라이프 / 정연희 역 / 문학동네 출판 / 출간일 2013-12-05.


2013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앨리스 먼로의 마지막 작품집이 될 가능성이 있는 책, 디어라이프 입니다. 수상 이전에 절필 선언을 했지만,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입장 번복이 가능할 듯한 뉘앙스를 풍겨 살짝 기대가 되기도 하네요. 이 책은 "Master of the contemporary short story."라는 스웨덴 한림원의 노벨상 수상자 선정 이유에 걸맞게, 현대 단편소설 거장의 공력이 담긴 10편의 단편과, 그녀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긴 소설과 수필 중간 쯤에 있다고 볼 수 있는 4편의 작품이 합쳐진 총 14편의 작품이 담긴 단편집입니다.





불친절한, 하지만 문득 뜻을 이해하면 소름끼치는 묘사

먼로의 작중 인물 설명과 플롯 전개는 불친절합니다. 등장인물의 이름과 캐릭터를 친절하게 설명해 주지 않고, 작품 속에서 다른 등장인물이 이름을 불러주지 않으면 지금 이야기를 진행해 나가고 있는 인물의 이름도 알 수 없고, 대부분 대명사로 처리되는 다른 인물들과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서 집중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지만 먼로 문체의 가장 큰 특징은 이처럼 불친절하다고 느낄 정도로 주위에서 흔히 벌어질 수 있을 듯한 사건을 덤덤하게 묘사하지만, 행간의 의미와 벌어진 맥락 사이의 의문점이 해결되어 우리의 머리 속에 뚜렷한 이미지가 그려질 때 소름끼칠 정도로 특별한 이미지를 남긴다는 점 입니다.


상실 전문가. 그녀를 그렇게 불러도 좋으리라. 그녀와 비교하면 그는 초보였다. 지금 그는 그녀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예전에 그렇게 잘 알고 있었던 그녀의 이름을 상실했다. 상실한다. 상실되었다. 그를 놀리고 싶다면, 놀려라.

그가 집에 다 와서 계단을 올라가는데 그녀의 이름이 떠올랐다.

리아.

그녀의 이름을 기억해낸 순간, 이루 말할 수 없는 안도감이 그를 감쌋다. <메이벌리를 떠나며> 中 p.118


<디어 라이프>를 예약구매까지 해놓고, 다른 사람보다 하루 일찍 집에서 편안하게 받아놓고도, 이 책을 다 읽는데 거의 열흘 가까이 걸렸던 것은 작품을 다 읽어버리는게 너무 아쉬워서인지, 작품의 숨은 여백을 하나하나 곱씹어보며 추측하고 있었는지 확신이 들지는 않지만... 올해 읽은 수 많은 책 중에서 가장 오랜 독서시간을 요구한 작품입니다. 지루해서 집어던진 것도, 방대한 분량에 숨이 막힌 것도, 도저히 어려운 문장을 이해할 수 없어서 포기한 것도 아닌데 말이죠. 특히 이 작품집에서는 먼로가 담백한 시선으로 훔쳐본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참 좋았습니다.


어린 시절의 충격적인 기억들, 그리고 트라우마

작가의 어린 시절 에피소드를 다룬 자전적 단편 <시선>에서 작가는 알고지내던 이의 시체를 처음 보았을 때의 경험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역시 자전적 단편인 <목소리들>에서 공군 장병들과 젊은 매춘부의 성애 장면을 지켜보면서 작가가 성(性)에 처음 눈을 뜨게 되는 경험도 담백하게 적어져 있지만 우리는 그녀가 그때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기차>에서는 아버지와의 성적인 경험을 겪은 직후 아버지가 집 밖으로 나갔다가 기차에 치여 죽은 기억에 사로 잡혀 살아가는 벨이라는 인물도 등장하고, 이번 작품집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자갈>이라는 단편에서는 언니 카로의 죽음과 관련해 자신이 그 사건이 벌어지는 동안 올바른 대처를 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고통받는 주인공의 생각.


지만 내 마음속에서 카로는 여전히 물을 향해 달려가 의기양양하게 자기 몸을 던지고, 나는 여전히 그것에 붙들려 있다. - <자갈> 中 p.142 


책을 덮을 때 즈음 우리들 모두는 살아가면서 겪은 충격적인 사건에 사로잡혀, 현재에도 과거의 그림자가 드리운 채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불륜... 혹은 로맨스?

공중파TV에서 매주 방영되는 <사랑과 전쟁>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어서 -물론 지인들과 사랑방에서 만나서 소곤소곤 전해지는 이야기가 훨씬 파격적인 사연들이 전해지겠지만요 ^^;;- 우리나라 사람들은 불륜이라는 소재에 다소 익숙할 수 있지만, 먼로는 다른 작품들에서도 그렇고, 이번 작품집에서도 불륜을 소재로 다룬 작품들이 참 많이 나옵니다.또 불륜이라고 비난 받을 수 있는 등장인물들의 행위는 먼로의 담담한 서술과 아름다운 묘사와 맞물려 아름답게 그려집니다. 


<코리>에서는 불륜을 저지르다 그 사실을 아내에게 알리겠다는 가정부의 협박에 매년 두번씩 돈을 바치게 되는 이야기가 등장하고, <자갈>에서 주인공의 어머니는 불륜을 저지르고 남편과 별거한 뒤에 새 사랑을 찾아 아이들을 데리고 트레일러로 떠납니다. 어린 시절 시점에서 주인공과 주인공의 언니가 기르던 개를 몰래 친아버지가 사는 집에 데려다주는 사연이 나오고, <일본에 가 닿기를>에서는 주인공 그레타가 남편을 제외하고도 파티에서 만난 인물, 침대칸 기차에서의 또 다른 남성과의 급한 정사, 그리고 기차가 도착한 역에서 다시 파티에서 만난 인물과의 재회를 거치는 복잡한 사건도 벌어지죠. 기차 안에서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 케이티를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고 껴안았을때 아이의 대사가 인상적입니다.


"엄마한테서 나쁜 냄새가 나." 아이가 말했다. - <일본에 가 닿기를> 中 p.36


과연 케이티가 그레타가 아이를 찾고 올라온 신물 냄새를 맡은 것일지... 아버지가 아닌 낯선 남성의 체취를 맡아서 그랬는지....

이번 작품집에서는 이 소재를 다룬 <자갈>과 <일본에 가 닿기를>에서는 어린 아이가 등장하는 공통점도 있군요. 사랑과 가정 사이에서 부정을 저지른 이들의 대처가 제각각 인 것도 참 흥미로운 부분이었습니다.


병을 앓는 사람들과 타인의 시선

또한 먼로의 작품에는 질병이 주요한 소재로 등장합니다. 이전에 소개했던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의 마지막 수록작, <곰이 산을 넘어오다>에서도 알츠하이머가 주요 소재로 사용되었고, 먼로의 초기작들을 모아 놓은 <행복한 그림자의 춤>에서도 <나비의 나날>에서 백혈병에 걸린 친구가 등장하죠.


2013/11/24 - [Reading Note/영어권문학] - [앨리스 먼로]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이 책에 수록된 단편 중에서는 <메이벌리를 떠나며>에서 심막염을 앓는 아내, <자존심>에서 언청이인 남자 주인공, <코리>에서 어린 시절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가 불편한 코리, 그리고 <호수가 보이는 풍경>에서도 주인공 낸시의 알츠하이머를 이용한 소름끼치는 반전을 이끌어 내기까지 다양하게 이용이 됩니다. 국내 번역된 먼로의 다른 단편집들에서는 해설이 풍부하지 않아서 미처 알지 못했지만, 이번 먼로의 자전적인 4편의 단편을 읽고 나니 이유를 알 수 있었네요. 먼로의 아버지가 사업에 망하고, 어머니가 파킨슨병을 40대에 앓게 된 과정이... 마치 소설 속 등장인물이 겪게 된 일 처럼 담담하게 먼로스럽게 쓰여지고 있습니다.


먼로의 작품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질병들은 사회 생활에 지장을 주는 질병들입니다. 행동이 불편해지던가 정신이 온전치 못하게 되는 병들이기 때문에 다른 이들의 시선을 받게 됩니다. 먼로는 이런 타인의 시선을 받는 등장인물의 상황으로 극의 스토리를 전개해 나가기도 합니다. 이번 작품집에서는 <아문센>에서 요양원의 신규 교사로 들어온 여교사를 대하는 간호사들의 텃새가 그녀가 요양원의 의사와 깊은 관계를 맺어감에 따라 우호적으로 변해 가고,  자전적인 단편 <목소리들>에서 주인공의 어머니는 파티의 다른 참석자들과 다른 의상을 입은 자신의 모습에 심리적으로 위축되는 부분으로 이용되었죠.


결국은 인간적인 모습

이런 다양한 소재를 다룬 작품이지만, 먼로의 작품 속에서 작가는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간적인 모습들도 여기저기 묘사해 놓았습니다.


세상사는 절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뤄지지 않고


모든 것이 큰 탈 없이 진행되었지만,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그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 <안식처> 中 p.171


누군가와 평생을 함께 살아와도 본연의 성격은 바뀌지 않으며


나라면 그러지 않는다. 어떤 약속을 했건 나는 편지를 뜯어볼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내가 시킨 대로 할 것이다.(중략)

이켜보면 우리가 함께했던 삶 전체가 그랬다.  <돌리> 中 p.330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과 타협합니다. 그게 어떤 문제일지라도...

어머니의 마지막 순간에도 그리고 장례식에도 나는 집에 가지 않았다. (중략)

사람들은 말한다. 어떤 일들은 용서받을 수 없다고, 혹은 우리 자신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하지만 우리는 용서한다. 언제나 그런다. <디어 라이프> 中 p.415-416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많이 메모를 해가면서 읽은 작품이 없었는데... 요즘들어 고민 많던 저에게 큰 위안이 되어 준 먼로의 작품이라 더욱 애정을 가지고 읽어내려갈 수 있었습니다.


스펙에 연연하고, 학벌을 따지고, 집안배경까지 따져가는 각박한 현대 사회에서 먼로의 시선을 빌어 다른 사람들의 세상살아가는 모습을 순수하게 지켜볼 수 있어서 다른 그 어떤 멘토의 힐링보다도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꼈던 독서 시간이었습니다. 쌀쌀한 겨울 밤, 침대 곁에 두고 자기전에 짧은 단편 한 편 한 편 읽어내려가면서 즐기셔도 좋을 이 책 다른 분들에게도 추천드려봅니다.


디어 라이프 - 10점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