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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ing Note/영어권소설

단편소설 거장의 첫 춤사위 - 행복한 그림자의 춤

[앨리스 먼로] 행복한 그림자의 춤 / 곽명단 역 / 문학에디션 뿔 / 출간일 2010-05-01.


블로그를 처음 연 날 올린 글도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의 서평이었고, 아마 2013년이 며칠 남지 않은 이 시점에서 올해 저 혼자 매기는 최고의 책 순위에서도 1위를 차지할 것이 유력한 <디어 라이프>도 얼마전에 포스팅 했는데... 또 앨리스 먼로의 책이라니...


어지간히 저에게 큰 인상을 남긴 작가인가 봅니다 ^^;;


지난 포스팅

2013/11/24 - [Reading Note/영어권소설] - [앨리스 먼로]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2013/12/17 - [Reading Note/영어권소설] - 단편 소설의 거장, 먼로의 시선으로 본 사람들의 삶




앨리스 먼로의 다른 작품집들을 먼저 접하고 나서 1968년 출간된, 먼로의 첫 소설집을 선택한 것은 안좋은 선입견을 가지고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먼로의 원숙하고 모호한 문체에 익숙해 진 뒤에 풋풋한 초기 저작들을 만나니 '필력이 더 떨어질거야.', '뭔가 부족한 점이 있겠지.', '누구는 처음부터 글을 잘쓰나?'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책을 읽어내려가게 된거죠.


솔직히 앞서 포스팅 했던 두 작품집에 비해서 이 책에서 더 감명을 받거나 재미를 느끼진 못했습니다. 특히 주석을 전부 책의 뒤로 몰아넣는 방식으로 되어 있어서 우리 문화에 익숙하지 않아 해설이 꼭 필요한 부분을 찾기 위해서 자꾸 책 뒤로 넘겨봐야 해서 작품에 몰입을 방해하는 책 편집 때문에 작품에 집중하지 못한 점도 크게 작용한 것 같구요.


아직 먼로를 접하지 않으신 분들이라면 꼭! 이 작품부터 접하고 후기 저작들로 넘어가시길 간곡히 바랍니다 ^^;; 저같은 후회와 실망을 하지 않으시려면요. (생각을 해보니...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과 이 책을 같이 구매해놓고 이 책이 더 전에 발표된 작품집이란걸 알면서도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을 먼저 읽기 시작했던건... 왜 그랬는지 아직도 모를 일입니다. 먼로 작품에 푹 빠지는 계기가 되긴 했지만 이런 후회는 안했을텐데 말이죠 ^^;;)


그럼에도 불구하고 풋풋한 데뷔작이라 치기엔 실린 작품 자체는 뛰어납니다. 먼로 특유의 모호한 묘사와 표현이 가져다주는 불친절함이 아직 초기저작에선 보여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독자가 읽어내려가기 편한 점도 좋은 장점이 될 수 있구요.


먼로의 후기 저작들이 중년 여성의 불륜(혹은 로맨스?)를 주요 소재로 삼는데 비해서 초기 저작을 모은 이 책에서는 어린 소녀들의 사춘기 문제들이 다양하게 그려집니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의자 옆에 있는 거실 스탠드를 켜는 순간 방이 나를 덥쳤다." - <하루강아지 치유법> 中 p.171


태어나서 술을 한 번도 마셔보지 못한 소녀가 위스키에 물을 타먹는지도 모르고, 남들이 물을 타서 그정도로 먹는 양을 스트레이트로 2 글라스를 비우고 나니 만취해서 쓰러지는 모습을 재미나게 표현했습니다.


인상적인 작품 중 하나였던 <나비의 나날>에서는 다소 모자란 남동생과 함께 학교에 다니는 마이라 세일라 라는 친구를 따돌리는 또래 집단의 모습도 그려지고 있는데요.


"그런데 우리는 이제 한 가지 놀이를 만들었다. '마이라에게 잘하자!'로 시작되는 놀이였다." - <나비의 나날> 中 p.41


자신과 다른 아이나 좀 덜 떨어져 보이는 아이들에게 잔인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동서양 구별도 없는 듯 합니다.


책 전체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표제작인 <행복한 그림자의 춤>이 아니라, 가장 처음 실린 <작업실>이라는 작품이었습니다.

작가를 꿈꾸는 가정 주부가 집안 구성원들의 양해를 구하고 작은 작업실을 얻어서 글을 써나가기 시작하는데, 이래저래 오지랖을 떨어대는 집주인 사이에서 겪는 심리적 갈등을 먼로 답게 묘사한 작품인데요. 작품의 마지막 주인공의 생각이 참 인상적입니다.


"원고를 다듬으면서 나는 생각한다. 그 남자를 지워 없애는 것은 내 권리라고." - <작업실> 中 p.34


우리 삶의 하나 하나 사건들을 뜯어서 생각하면 그 또한 멋진 단편 소설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이를 하지 않거나 못하고 있고, 이를 정말 뛰어나게 뚝심있게 해온 먼로의 저작들이 우리 삶의 모습들과 겹치면서 큰 공감을 일으키는 거라 생각됩니다. 아직 먼로를 접하지 않은 분들이라면 이 작품집부터 꼭 접하시고, 국내에 번역된 다른 먼로의 작품집들을 탐독하시길 다시 한 번 권합니다 ^^



행복한 그림자의 춤 - 8점
앨리스 먼로 지음, 곽명단 옮김/뿔(웅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