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Reading Note/한국소설

클리셰(Cliché)로 가득한, 그래서 더욱 특별해진 소설 - 높고 푸른 사다리

[공지영] 높고 푸른 사다리 / 한겨레출판 / 출간일 2013-10-28.


워낙 많은 평론가들이 클리셰(Cliché)라는 용어를 써와서 이제 대부분의 대중들은 이게 무슨 뜻인지, 최소한 부정적인 뉘앙스를 담고 있다는 것은 눈치로라도 알게 된 시대입니다.

원래 의미는 '판에 박힌 문구', '관용적인 표현' 등이지만 문학이나 영화 쪽에서는 너무 익숙해진 설정이나 문구 등을 뜻하는 용어로 사용되오고 있습니다.


사실 이 소설에서 진행되는 여러 사건들은 우리가 늘 보아온 주인공들의 애절한 사랑이 넘치는 드라마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슬픈 예감은 현실이 되고, 주인공 들은 언제나 간 발의 차이로 아쉽게 서로를 못 만나고, 우연히 갔던 장소에서 새로운 인연을 만나며, 수십년이 지난 특정 사건에 극의 주요 인물들이 서로 연결되는 등....


때문에 소설을 읽어내려가다 보면 "내 이럴 줄 알았어." 등의 혼잣말을 하면서 너무나 뻔하게 전개되는 스토리에 실망하게 될런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참 여러면에서 독특한 소설입니다. 


첫째, 형식의 독특함.

본방 기다리지 않고 자기 편한 시간에 IPTV나 스마트폰으로 다시보기가 일상화된 이 시대에 웹사이트도 아니고 일간지에 매일 연재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아날로그 감성이 물씬 풍기는 연재방식으로 쓰여진 소설이라는 점이 오히려 독특하네요.


둘째, 소재의 독특함.

신과의 약속으로 사랑이 금지된 가톨릭 수사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그래서 모순이 가득해도 더욱 애절한 이야기에 많은 독자들이 공감했을 듯 합니다.


마지막, 전개의 독특함.

무엇보다도 마치 작가가 대놓고 스포일러를 할려는 듯이 중요사건의 결과를 담담한 어조로 툭 던져놓고 이후에 그 사건의 경과를 자세히 보여주는 식으로 진행되는 부분은 독특하긴 한데, 아쉽게도 무수한 클리셰와 맞물려 소설의 뻔함을 더욱 강조하는 단점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




표지에 대한 일화 : 청아출판사에서 이 책이 발간되지 직전 해에 출간된 E. 젤린스키의 <우리가 잊고 사는 50가지>와 똑같아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지만, 일러스트 업체에서 정식적으로 구매한 사진이라 저작권법 쪽으로는 아무런 문제도 없고, 공지영 작가와 협의 후에 그냥 사용하기로 결정했다는군요. ^^

관련기사 :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1310/h2013103120552984210.htm


하지만 이 뻔하디 뻔해 보이던 소설을 극의 종착역에 이르러서야 지금껏 소설로만 여기고 읽어 왔던 이 이야기들의 대부분이 실제 벌어졌던 실화라는 사실에 독자들의 말을 잃게 만들고 맙니다. 단행본으로 봐도 정말 충격적이었는데 일간지에서 연재로 이 작품을 접해왔던 꾸준한 독자들에게 다가왔을 충격을 얼마나 더 컸을지 ^^;;


가톨릭 수사들의 이야기가 작품의 주요 소재인만큼 최근에 비구니들의 수행과정을 다룬 에세이인 <길 위에서>를 읽었던 것은 또 다른 행운이었다고나 할까요?  다르면서도 비슷한 두 종교의 수행과정이 함께 읽었기에 더 좋았던 것 같아요.


2013/12/25 - [Reading Note/시/수필/희곡] - 속세를 벗어나 비구니가 되기까지의 여정 - 길 위에서



이 소설은 또 눈여겨 볼 만한 구절이 있습니다.

이미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통해서 사형제도에 대해, <도가니>를 통해서 장애인학교에서 벌어지는 성폭력 실태에 대한 사회적 거대 담론을 이끌어낸 바 있고, 지금도 SNS를 통해서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공지영 작가에 대한 특정 미디어의 도를 넘어서는 비꼼이 있어왔습니다. 


소설의 초반부에 주요 등장인물인 미카엘의 입을 빌어 하는 이 대목은 어쩐지 작가 자신의 목소리인듯한 생각이 들어서 더욱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전략, 미카엘이 주교와 장상들을 비난하며)과연 예수가 다시 온다면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할까? 내 생각에 예수가 다시 온다면 그들이 가장 먼저 나서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버릴거야. 아니면 쥐도 새도 모르게 지하에 감금하겠지. 아니다. 현대에서는 그런 방법이 아니다. 그건 비난받을 확률이 너무도 높아. 제일 좋은 건 미디어를 이용해 그를 바보로 만드는 거야.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트집 잡아 기사를 내겠지." - p.53.


기독교적 느낌이 물씬 풍기고, 작중 인물들 대부분이 성직자인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은 성격이 전혀 다른 세 수사들의 상반된 캐릭터가 뿜어내는 다양한 대화 사이사이에 숨겨진 잠언과도 같은 울림이 있는 문장들이었다고 전 생각합니다.


제가 책 전체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안젤로 수사의 말을 남기며 이 서평을 마칩니다.


"(전략, 안젤로의 말) 우리 엄마 살아 계실 때 그러셨어요. 언제든 엄마는 내가 옳다고 하셨죠. (중략) 엄마 말은 믿을 수 없어. 엄마는 맨날 내가 옳다고 하잖아? 하니까 엄마가 그러셨어요. 그러니? 미안하구나. 하지만 난 언제나 네가 옳은 거 같아. (중략) 혹여 니가 잘못한다 하더라도 네가 옳다고 해주고 싶어. 그래야 네가 정말 잘못했을 때 혼자 잘못한 듯 외로워지지 않을 거잖아....." - p.65-66.





높고 푸른 사다리 - 8점
공지영 지음/한겨레출판